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하라 신타로 (문단 편집) === 환경 정책 === 도쿄의 대기는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였던 1950~1960년대 급속히 악화됐다. 일본 최대 게이힌(京濱) 산업단지의 공장과 화력발전소, 그리고 늘어난 차량들이 오염물질을 대량 배출하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빨래를 널면 저녁에 새카맣게 변했다.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 도쿄도지사가 1967년 당선됐을 때 내세운 구호가 '도쿄에 푸른 하늘을'이었을 정도였다. 당시엔 꿈처럼 여겨졌던 '푸른 하늘'이 이후의 도쿄에선 일상사가 됐다. 도심인 [[신주쿠구|신주쿠]] [[도쿄도청]]에서 100 km가량 떨어진 [[후지산]]이 또렷하게 보이는 날이 사흘에 하루 꼴이다. 2016년 말,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 시내 미세먼지가 사회문제가 되자 안 이달고 시장이 나서 "도쿄를 모델로 삼아 파리에서 경유차 통행을 금지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도쿄는 미세먼지 문제를 극복한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2000년 2월 4일 도쿄도청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지사가 페트병을 들고 흔들자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페트병 안에는 디젤차에서 배출된 그을음(미세먼지)이 담겨 있었다. "이런 미세먼지가 도쿄에서만 하루에 12만 병이나 나온단 말입니다!"라고 말한 이시하라는 이어 "국가와 싸워서라도 디젤을 몰아내겠다. 우리가 지더라도 부끄러운 것은 중앙정부일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도쿄도청은 대기질이 악화된 1960년대 후반부터 중앙정부와 함께 대기오염 대책을 마련해 시행했다. 그 결과 아황산가스(SO2) 등 오염물질 수치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뿌연 하늘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1999년 당선된 이시하라는 노후 경유차의 배기가스를 대기질 악화의 최대 원인으로 규정했다. 미세먼지 대부분이 경유차에서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경유차는 도쿄도내 차량의 20%에 불과했지만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질소산화물(NOx)의 70%를 배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시하라는 당선 4개월 만에 '경유차 NO 작전'을 발표하고 경유차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국토교통성]], [[환경성]], [[경제산업성]] 등 부처 간 갈등으로 중앙정부가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쿄도가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경유차 NO 작전이란, 1. 경유 승용차는 타지도, 사지도, 팔지도 않을 것 1. 대체 가능한 업무용 경유차는 의무적으로 휘발유차로 바꿀 것 1. 배출가스 저감장치 개발을 서두르고 장착을 의무화할 것 1. 경유를 휘발유보다 싸게 만든 정책을 고칠 것 1. 경유차 배기가스 기준을 충족하는 차를 조기에 개발할 것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이는 도쿄도의 파격적인 정책에 자동차 관련 업계는 경악했다. 자동차 제조업체 모임인 일본자동차공업협회와 화물차 운송업자 모임인 전일본트럭협회는 '경유차가 악이냐' 하는 내용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디에 가든 그을음 가득한 페트병을 들고 다니며 미세먼지 문제의 심각성을 외치는 그는 언론 헤드라인을 자주 장식했다. 또한 이를 통해 여론을 점차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경유차 제조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 "시간이 지날수록 도민들이 죽어 나간다. 딱 2년이다. 그 이상은 못 기다린다." 하며 빨리 저공해 차량을 개발하라고 엄포를 놨다. 자민당 간부들을 만나 경유차에 유리한 세제를 바꾸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2000년 1월 말 [[고베시|고베]]지방법원은 "도로에서 발생한 배기가스로 주민들이 병에 걸렸다면, 국가와 도로공단이 배상해야 한다"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아울러 재발 방지 조치를 마련하라고 했다. 이시하라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도가 도민의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며 경유차와의 전쟁에 더 속도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전담 부서인 자동차공해대책부도 만들었다. 그해 말에는 노후 경유차의 도내 운행을 2003년 10월부터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7년 이상 된 트럭과 버스 등이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운행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면 50만 엔(약 500만 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이었다. 일각에선 '주행 중인 차를 어떻게 일일이 단속할 수 있겠누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이시하라는 시행 1년 전인 2002년 '위반 경유차 일소작전'을 발표했다. 경찰 출신 등으로 경유차 감시를 담당하는 '자동차 G맨' 7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자동차 20대 이상을 사용하는 회사 3,800여 곳을 일일이 돌며 규제 내용을 알렸고, 노후 경유차 운행 금지 시행 후에는 도 전역을 순찰하며 수천 대를 단속했다. 고정형·이동형 카메라를 동원해 단속을 벌였고, 주민들의 신고를 받는 '검은 연기 스톱 110번' 캠페인도 시작했다. 당근도 제시했다. 중소기업에 한해 배출가스 저감장치 부착 비용 절반을 보조했고, 추가로 돈이 필요하면 대출을 알선해줬다. 도쿄도만의 정책으로 대기오염을 줄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노후 화물차가 도쿄도의 규제를 피해 우회도로를 주행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지자체 간 갈등으로 번질 조짐도 있었다. 이시하라는 수도권 지자체인 [[가나가와현]](神奈川), [[치바현]](千葉), [[사이타마현]](埼玉) 지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규제와 단속을 공동으로 실시하자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이 지자체들도 비슷한 조례를 만들며 동참했다. 경유차 규제 흐름이 조성되자 정부도 배기가스 규제 강화 일정을 앞당겼다. 언론에서도 "초미세먼지(PM2.5)를 [[미국]] 수준으로 규제할 경우 도쿄 내 사망자가 연간 5천 명 이상 줄어들 것"이라며 호응했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미세먼지(SPM·우리의 PM10과 유사한 기준)는 2005년부터 기준치[* 시간당 일평균이 ㎥당 0.10 mg 이하이면서 시간당 수치가 ㎥당 0.20 mg 이하] 이하로 나타났다. 초미세먼지의 연중 평균치는 2001년부터 10년 새 55%나 줄었다. 도쿄에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규슈대 대기해양환경연구센터의 다케무라 도시히코(竹村俊彦) 교수에 따르면 1990년대 도쿄의 시야불량[* 대기 중 먼지에 의해 시야가 10 km 미만인 경우] 연간 누적시간은 3,000시간[* 1년 전체는 8,760시간]에 육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100시간 미만으로 줄었다. 초미세먼지 감소의 영향으로 도쿄도내 뇌중풍(뇌졸중) 사망률이 8.5% 줄었다는 연구 결과([[오카야마대학]] 연구팀)도 나왔다. 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퍼져나가서 경유차 규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경유차와 미세먼지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실증된 바가 없다"고 자동차회사와 석유회사가 주장해 대부분 국가에서 규제되지 못하였으나, 이시하라 신타로가 입증을 해버렸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규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극우 성향으로 한국에서 '망언 제조기'라고 불리는 이시하라 신타로는 도민들에게 맑은 하늘을 돌려준 공으로 13년 반 동안 지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시하라가 도쿄도민들에게 인정받는 공은 이것과 [[치수]]사업 딱 두개였다. 치수사업에 대해선 임기 후반부에야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거에 대해선 여전히 말이 많지만 이거 하나로 정치경력을 계속 이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는데 1977년 환경청에서 일할 당시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보고 와서는 "IQ가 낮은 사람들이다.", "보상금을 받으려고 가짜로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발언을 해서 사람들을 분노케 했던 것이다. ~~정말 싹수가 노란 인간이다.~~ 이 때문에 그는 피해자들에게 [[도게자]]를 해야 했다. 그나마 이 사건 이후로는 환경문제에 대해서만은 정신을 차려서 위와 같은 업적을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